윤제 정상환

숲은 후대에 물려줄 가장 값진 유산
보성 주월산과 초암산이 품은 소통의 숲, 윤제림(允濟林)

윤제 정상환

홈으로 > 소통의 숲 > 윤제 정상환

민둥산을 거대한 숲으로 일군 윤제(允濟) 정상환(鄭尙煥)'
"숲은 후대에 물려줄 가장 값진 유산"


물남이골에 꽃 피운 동심
"어느덧 푸른 바다 건너 붉은 대륙이 눈에 띄어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 볼때 황폐해진 산악이 한국의 첫 인상이었다” 1950년대 6.25의 전화가 휩쓸고 지나간 뒤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 관광객의 수필 한 대목이다.

윤제 정상환 선생(1923~2005)은 신문을 통해 이 글을 읽고 너무나 수치스러웠다고 한다. 아름드리 나무사이를 맴돌며 숨바꼭질하던 어린 날의 동산을 그리워했던 그는 푸른 숲이 우거진 자신의 산을 늘 갖고 싶어 했다.
그에게 외국인에게 비친 우리의 산천은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아버지 정상환 선생의 뒤를 이어 윤제림의 대표를 맡고 있는 정은조 회장은 “일본을 자주 왕래 하던 아버님께선 ‘한국의 산은 일본의 산과 너무 다르다’며 조림에 남다른 애정과 각오를 보이셨다고” 술회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그 꿈을 1964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전쟁의 와중에도 전남지역에 물자를 공급하며 이재에 눈을 뜬 선생은 술을 만드는 주조장과 극장 운영 등으로 모은 돈을 들여 당시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던 이정래 씨로부터 전남 보성군 겸백면 수남리 일명 ’물남이골’이 있는 초암산과 주월산 일대 임야 265ha를 사들였다.

70년대 당시 산림녹화에 매진하고 있는 정상환 선생

그 당시 매입한 가격은 서울의 유명한 서대문극장을 살 수 있었던 큰 돈이었다.
이때부터 조림에 대한 꿈은 하나씩 이뤄지게 되었다.
그 첫 사업으로 1969년 보성군에서 해송, 편백 등 6만 본의 묘목을 보조 받았다.
그러나 처음엔 조림 경험도 없고 지역에 특별한 연고도 없는데다 임지와 4Km나 떨어진 마을 앞 도로는 묘목 운반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의욕만 가지고 달려든 조림 사업은 마음과 달리 제자리걸음을 되풀이 했다. 몇번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 포기하고 있을 무렵 1970년 새마을 운동의 붐과 함께 기회가 왔다.
당시 수남마을 이장이었던 이복래 씨의 협조로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은것이다.

시련은 밝은 내일을 위한 진통
수남마을과 자매결연을 계기로 마을 사람들에게 산을 푸르게 가꾸고 조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물남이재로 가는 농로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공사에 소요되는 비용 전액을 선생이 책임지겠다는 말과 함께 였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동조하고 나섰지만 다시 벽에 부딪혔다.
문중 토지 50평의 사용 승낙을 받아내지 못해 급기야 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해당 문중으로부터 고발을 당해 생전 처음 검찰에 불려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시련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조림 사업 10개년 계획을 세운 그는 결국 1971년 자비 200만원을 들여 3Km의 농로를 어렵게 개설하기에 이른다.
“오늘 우리가 겪어야 할 시련은 밝고 생기 있는 내일을 위한 진통이다. 이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은 위대한 조국의 재건과 후세들의 영광을 위한 보람 있는 희생이다.”

정상환 선생이 인부들과 함께 작업을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시련을 겪으면서도 조림 사업에 대한 뜻을 이어 가고자 했던 선생의 의지는 1990년 대 중반 산림조합중앙회에서 펴낸 한 잡지에 실린 글에도 담겨 있다.

민둥산의 기적, 45년 조림으로 완성된 명품 숲
전화를 놓고, 전봇대를 세워 임지의 관리사까지 전깃불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처음엔 저러다 말겠지 하던 마을 주민들의 시선도 천막 노숙하며 인부들과 함께하는 그의 노력에 서서히 바뀌어 갔다.
정은조 회장은 “아버님께서 주로 청바지를 입고 산일을 많이 하셨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다리가 가시에 찔려 온통 상처 투성이었다”며 "그런데도 밤늦게까지 산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백과사전이 다 닮아지도록 공부하셨다”고 회상한다.

“산림은 인공 조림, 천연림 할 것 없이 가꾸는 사람의 손에 달렸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나무는 가꿔야만 잘 자란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선생은 염소와 젖소를 키워 거기서 나오는 분뇨와 퇴비를 밤나무에 시비하고 밤나무에서 얻어지는 수익은 다른 나무 관리에 재투자했다.
1978년에는 젖소 100두를 더 늘려 밤나무 간벌지역에 임간 방목을 하여 조림과 축산을 병행했다. 1981년 1차 조림10개년 계획이 끝나자 10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임도 설치와 간벌 그리고 밤나무를 대체할 조림 등을 포함한 새로운 10개년 계획을 세웠다.

전화위복이 된 솔잎혹파리
한 때 남해안 일대 만연된 솔잎 혹파리는 또 다른 시련이었다. 항공방제를 포함한 수많은 노력도 허사였고, 솔잎 혹파리가 지나간 자리는 폐허만 남았다.
그런데 소나무류는 고사 되었으나 참나무, 상수리 나무는 오히려 더 잘 자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선생은 죽은 나무를 제거하고 자연림을 가꾸는데 힘을 쏟았다.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참나무 숲이 조성된 배경이다.
산림육성에 관한 공부와 간벌, 풀 베기, 덩굴제거, 임도 개설 등 나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한 선생의 노력에는 밤낮이 없었다. 그렇게 45년의 세월을 헌신해 만든 숲이 ‘윤제림(允濟林)’이다.

윤제림의 특별함은 수종의 다양함에 있다. 임도 옆으로 늘어선 삼나무, 참나무, 편백 등 능선 별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수종들은 윤제림에서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윤제림의 가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2ha에 걸쳐 조림된 참나무다. 한때 임업연구기관이 시배지로 지정했을 정도로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참나무 숲은 선생이 ‘상수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깊은 애정을 갖고 조성한 결과물이다.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표고 목의 조달지로서의 주요한 역할과 함께 소득 창출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숲, 후대에 물려 줄 가장 값진 유산
“숲과 나무는 짧은 시간에 얻을 수 없으며, 비록 개인의 소유라 해도 효용은 국가적 또는 온 인류의 공유 자원입니다.”
선생은 숲을 후대에 물려 줄 가장 값진 유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책임 있는 관리가 필요하고 산림입국을 꿈꾸며 조림사업을 펼쳐 온 독림가 들의 뜻이 왜곡 없이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그러기 위해선 국가차원의 제도정비도 필요하다 주장하기도 했다.

보성 벌교가 고향인 선생은 조림사업 외에도 전남문화사, 보성군사, 새마을 운동사, 88올림픽사, 보성문학대간, 화담사지(花潭詞誌), 하동정지(河東鄭誌), 광주향교지 등의 편찬에 참여하고 그 과정과 의견을 유림춘추(儒林春秋)에 기고 하는 등 유학자로서 전남향토문화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각종 훈장과 상패 / 성균관 명륜당 앞에선 윤제 정상환 선생

1970년대 대포리(大浦里) 회관 건림, 벌교 동서남북교의 환경 조성, 우범지역 전기가설, 식수난지역 우물파주기, 벌남교 체육기구 설치 부담 등 지역사회개발과 농업기술 보급에도 앞장섰다.
선생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도 남달랐다. 낙도 아이들을 위한 분교를 마련해 기증하고, 장학방송에서 특집으로 소개할 정도로 칭송이 자자했다.

선생은 향토문화 뿐만 아니라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도 헌신적이었다. 홍암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홍암 나철 선생의 업적을 2003년 유림춘추에 연재하고 벌교 칠동리 금곡 마을 생가터에 사재로 부지를 마련해 유적비를 건립했다.

윤제림 입구에 세워진 선생의 공적비(왼쪽)와 부인 박정례 여사의 공적비

또한 성균관 유도회총본부 회장직무 대행을 맡아 사단법인 법국민예의생활실천운동본부를 창립하고 사회부조리 척결, 효사상 고취에도 힘을 쏟았다. 선생은 대한적십자로부터 포상, 한국유도회와 성균관 관장의 표창, 보성군민상, 전라남도 모범도민상 등 수많은 표창과 상을 수상했다.
상장과 함께 받은 상금 또한 장학금과 소외계층을 위한 기금으로 내놓았다. 1992년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대한민국동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45년이란 시간동안 산을 가꾸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선생은 83세 되던 해인 지난 2005년 세상과 이별 하였다.
또한, 미망인 박정례 여사는 일생을 남편 뒷바라지에 헌신 하였고, 보성장학회에 5억원을 희사하였다.